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문의전화 : 054)639-7694~5
관광지 정보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소개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 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 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 후 퇴계 이황이 풍 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 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 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 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 향(安珦 )선생께서 공부하시던 곳에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기 시작하여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 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6)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유래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은 나라가 매우 어려 운 시기에 40여년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안향 선생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 줄기를 터놓은 분이 안향이다.
신재(愼齋) 주세붕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안향을 우리나라 도학 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 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 만에 안향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주세붕은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 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 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 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 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 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 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을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 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 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 남짓 땅 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 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 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 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 : 회헌 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 를 받들게 했다.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마련할 때,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 고을의 生員 몇 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 되는 명종원년(1546)에 안향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 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 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